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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 수장국이 건마국에서 목지국으로, 목지국에서 다시 백제국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자치력은 유지했으나, 적어도 3~4세기부터는 반파국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더니 475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잃고 공주로 남천하며 위상과 국력이 떨어지자 아예 그 이후부터는 다른 전남북 동부 옛 마한 소국들과 함께 반파국이 주도하는 가야 연합즉 가야 다리국(상다리,하다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510년대 초반 무령왕의 대가야 공세 때 백제에게 함락되면서 옛 원지국의 세력 기반은 완전 해체되어 백제의 직접 지배지가 되었고, 이후 대가야가 520년대에 백제에게 반격하는 과정에서도 백제는 여수시 일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가로지르는 산맥을 타고 좌우로 해촌면과 용두면이 자리하는데 여수에 소속되어 있던 용두면[4] 지역은 여수로 환원되지 않고 잔류 되었다가 1914년 군면폐합때 해촌면과 합쳐서 해룡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수현과 돌산현이 폐현된 결과, 순천도호부의 부곡으로 격하되고 5백여년동안 과거시험도 볼수 없었고 현단위도 없었으니 향교도 없고 지역민을 천민화시켜 문맹으로 방치함으로 벼슬에 오르는 길이 아예 막혀버려는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겪는 어려움에 시달렸다  특히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구의 변화는 그 축을 같이한다 전라남도의 시  육지부는 여수군이 관할했으며, 여수의 섬 지역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소속 섬들과 짜깁기되어 돌산군이 된다 

이후 6세기 후반에 관산성 전투 및 그 이후 여러 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게 패배하면서 전남북 동부 내륙 일대가 신라에게 넘어갔지만, 이때도 백제가 전력투구하면서 여수, 순천, 광양 일대만은 빼앗기지 않고 유지했고, 이후 660년 백제 멸망 때까지 백제의 강역으로 유지된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3] 1396년(태조 5)에 여수현이 폐현되어 순천도호부에 속한 여수면이 되었고 1414년 돌산현마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안 도서를 독자의 군현으로 편제하기보다는 수군 진지로 편성하고자 하는 방침과 관련이 있어 폐현되어 순천도호부로 편입되어 여수반도 전체가 조선시대 순천도호부의 땅으로 계속 잔류했으니 1696년부터 1897년 5월 16일 여수군 설군 되기 까지 길고 질겼던 삼복삼파가 시작되었다  그래서였는지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역에 들어간다 [7]

여수시는 여수엑스포 직후인 2010년대부터 도시의 모습이나 위상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실제로 죽림지구 택지개발사업시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이상 행정구역이 있는 곳과 달리 여수의 조선시대 문무관인들 숫자가 많지 않는 걸로 확인 되었다 4%를 담당하고 1,316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등, 전남의 핵심적인 도시다  또한 이 경계는 근대까지 이어져 돌산군과 여수군으로 나뉜 조선 말 까지 양 쪽의 생활권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때부터 승평군(순천)에 소속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승주목[2]의 속현이었으며 돌산현과 여수현으로 나누어져 존속하였으며 이는 여수와 돌산지역의 생활권이 구분되어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여수가 순천부 관할이지만 속현으로 되어 있음으로서 서로 생활 권역이 약간이라도 달랐음을 의미한다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의 지명 한자화 정책으로 여수시의 반도 육지권역은 해읍현, 화양면을 포함한 도서권역은 여산현(廬山縣)이란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이후, 1696년 숙종때 잠시 여수도호부로 승격, 복권 했다가 순천부 아전배들의 농간으로 다시 순천도호부로 귀속당했고 이후로도 역사를 반복했으니 (영조 때인 1725년, 1750년에도 반복) 삼복삼파로 불리었다 
1902년에 여수면을 쌍봉면(雙鳳面)으로 개칭하였다  이때의 유명한 건물이 이순신 장군의 진남관  1896년 완도군과 지도군하고 함께 돌산군이 먼저 신설되었고 육지부는 순천에 잔류했지만 불공평한처사에 여수주민들이 분노하여 또 다시 복현 운동의 결과로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정확히 500년만에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하여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설치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는 여수군이 복군되었다  한려해상,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두 국립공원 모두 여수시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중 한려해상의 려가 여수시를 의미한다 

전라남도 2위인 272,826명의 인구와 전남 GDP의 50% 가량을 만들어내며 전라남도 수출액의 74 

1479년 내례만호진을 폐하고 전라좌수영이 설치됨으로 인해 순천부와 전라좌수영의 이중통치와 이중과세로 인해 순천부로부터 분리  백제 성왕 때 이미 여수에선 반도지역은 원촌현[1], 도서지역은 돌산현(突山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08년에 쌍봉면에서 현내면이 분리되었다 

복설 후 소라면에서 화양면을 분리하였다   따라서 여수시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2010년대를 기준으로 구분해서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오림동이나 돌산등지에 이를 뒷받침하는 고인돌 유적이 발견되어 일부 보존된 상태이고 부속도서인 안도나 송도등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패총이 발견된바 있다 

대부분의 전라도 지역이 그러하지만 신석기 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 왕건 때 이름이 다시 여수현, 돌산현으로 돌아갔다  순천도호부의 상급 기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은 성종 때 이래 여수에서 유지 된 것으로 보아 좌수영성지인 여수와 그 일대는 사실상 순천에서 독립된 생활 권역을 계속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에 소라면 북부를 구산면(龜山面)으로, 남부를 덕안면(德安面)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이후 삼복삼파로 인해 1397년부터 5백여년간 여수군 설군을 통해 독립되기 이전까지 털릴대로 철저히 탈탈 털렸던 원한과 피해의식도 적잖게 있어 광양만권 통합에 적극적이지 못한 편이다 

이후 기원전 4~3세기에 중국 전국 시대 연나라가 고조선의 요동 및 청천강 이서 영역을 침탈했을 때 한반도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대량 발생하는 흐름이 나타나는데, 이 시기에 여수 일대에 고조선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어 살게 되며 이들이 바로 훗날 삼한 마한 연맹체에 속했던 원지국(爰池國)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이 들 패총에서는 흑요석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 흑요석의 산지를 일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별 볼일없는 시골이었던 돌산이 최고급 펜션들로 가득차고 헤엄쳐도 갈 거리지만 다리가 없던 경도엔 2조원짜리 리조트가 들어왔으며 구도심이던 대교동 인근이 관광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독립을 하게 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조선 말기에 여수는 행정적으로 순천에서 독립하여 여수군과 돌산군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인근 군 

신라 왕궁 근위대 장교로 복무하던 견훤이 지방 군 지휘관으로 인사이동할 때 처음 배치된 곳이 다름아닌 순천-여수 일대 승평군이었고, 이 일대에서 복무하던 견훤이 다시 광주로 전근가서 기반을 잡았었다